
낙성대 공원 안국사 경내에 『강감찬 낙성대』라 새겨져 있는 사리탑식의 3층 석탑으로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봉천동218번지 집터에 있었으나,낙성대 공원 조성시 이곳으로 옮겨놓은것이다.
이 석탑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13세기경 추정)로 자재는화강암이며 탑의 높이는 4.48m이다.

조선 중기 문신 강사상(姜士尙: 1519~1581)과 그의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 합장묘가 있는 묘역이다. 묘역의 봉분은 쌍분이고, 신도비를 비롯하여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강사상은 1543년(중종 38년)에 진사가 되고 1546년(명종 1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는 도승지,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 중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1578년(선조 11년)에는 우의정과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신도비는 숙종 39년(1713년)에 세운 것으로, 묘역 아래쪽 비각 안에 있다. 이곳에는 조선 인조 때에 오도 도원수를 지낸 강홍립(姜弘立: 1560~1627) 장군 묘역 등 진주강씨의 묘역이 있어 조선시대 묘제와 석물의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조선 인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이경직(李景稷: 1577~1640)과 그의 두 부인인 보성오씨(寶城吳氏)와 고성이씨(固城李氏)의 삼위합장묘가 있는 묘역이다. 이경직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상고(尙古)이며 호가 석문(石門)이다. 1605년(선조 38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병조참판으로 뛰어난 외교적인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는 도승지와 호조판서를 거쳐 강화유수가 되었다가 별세하여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효민(孝敏)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비각 안에 있는 신도비는 1668년(현종9년)에 세운 것이다

이 불상은 관악산 북쪽 중턱에 있는 가로 5m, 세로 6m의 큰 절벽 바위 면에 사람 크기만 하게 미륵불의앉은모습을 얕은 돌을 새김으로 조각해 놓은 조선시대의 미륵불 좌상이며, 1982년 11월 1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상 오른쪽에 새겨져 있는 명문에 의해 이 불상이『미륵존불(彌勒尊佛)』이며, 승정 3년, 즉 인조 8년(1630) 4월 박산회(朴山會) 부부의 시주에 의해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왼쪽으 로 비스듬히 앉아있는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광배(光背), 대좌(臺座)는 완전한 편이다. 머리의 육계, 소방의 머리칼, 다소 풍성하게 보이는 갸름한 얼굴 등은 상당히 우수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늘씬한 체구나 타원형의 어깨 등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17세기 불상으로서는 뛰어난 솜씨로 조선조 조가사편년 설정에서 절대적인 자료가 되며 또한 미륵존불이라는 명문은 확실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있는데 17세기 조선조 사회에도 미륵신앙이 상당히 유행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따라서 봉천동 마애미륵불 좌상은 17세기 조선조 불상을 대표하는 기준이 될 만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거란의 10만 대군을 무찔렀던 인헌공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집터이다. 태어난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하여 그 생가의 터를 ‘낙성대’라 했다. 그곳에는 고려시대의 사리탑식 3층 석탑이 있어 낙성대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1973년 낙성대를 정화하면서 이 3층 석탑을 낙성대공원 안국사 경내로 옮기고 원래 3층 석탑이 있던 자리에는 1974년에 따로 높이 2m의 유허비를 세워 유서 깊은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의 지명(地名)이 금천(錦川)이었는데 장군의 출생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리탑식(舍利塔式)의 삼층탑(三層塔)을 세워 후세에 전해왔다.